[기이한 경험은 이때 이루어졌다. 불문학 강사였던 그는 네덜란드어를 몰랐고, 학생들은 프랑스어를 몰랐다. ‘무지한 스승’은 학생들에게 <텔레마코스의 모험>이라는 책의 프랑스어-네덜란드어 대역본을 교재로 삼아 ‘강의’를 시작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네덜란드어 번역문을 사용해 프랑스어 텍스트를 익히라고 주문했다. 스승과 학생 사이에 서로 통할 수 있는 공통의 언어가 없는 상태에서 학생들은 스스로 프랑스어를 기초부터 학습했다. 스승은 그 자기학습의 조건이자 계기로만 존재했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그들은 단어들을 조합해 프랑스어 문장을 만들었고 철자법과 문법도 스스로 익혀 완성시켰다. “더구나 그들이 구사하는 문장은 초등학생 수준이 아니라 작가 수준이었다.”...... “우리의 문제는 지적 능력이 평등하다고 가정함으로써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는 것이다.” 스승과 학생 사이의 나눔·분할을 거부하고 평등한 자들의 공동체를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출처:한겨레 책소개글: 지적 평등이 두려워 저들은 독학을 깔본다 _ 고명섭
자크 랑시에르...<감성의 분할>은 헉헉거리면서 냄새를 맡고 또 <호모 사케르>를 사다놓고 아직 제대로 읽지를 못해서 <무지한 스승>을 사서 보고 싶은 마음과 억누르는 마음이 서로 줄을 당기고 있다. 어쨌든 <무지한 스승> 소개글에서 내가 이해한 바는 '스승'과 '제자'라는 제도가 가정하는 지적 불평등이라는 원초적 조건이 그리고 그것을 현실화시키는 제도가 배움을 가로막을 수 있다는 점이다. 유아들의 왕성한 지적 호기심과 탐구에 비하면 학생들은 제도에서 시간을 보낼수록 수동적인 자세를 체화하게 된다. 제도는 끊임없이 요구한다. 나를 억누르고 너를 따라가라고 말이다. 그래서 결국 제도가 요구하는 최소의 자발성조차도 포기해버린 무기력한 학생들이 양산된다.
얼 쇼리스의 <희망의 인문학>과도 일견 통하는 지점이 있어보인다. 너희들에게 필요한 것은 밥이지 인문학은 어림도 없어라는 세간의 생각을 뒤엎는 시도, '우리는 언제 최대로 영민함을 발휘하여 배우는가'라는 질문은 배움의 과정이 인내와 고통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의 획득과 그로인한 쾌감에 있는 것일 수 있다는 점에서 연결되지 않을까.
오래전 나는 체제의 답답함과 일상의 반복이 주는 구속감이 미치도록 싫었고 그래서 틈만나면 어디론가 탈출하고자 했다. 그것은 영화이기도, 술이기도, 연애이기도, 여행이기도 했다. 그 시절, 유럽여행이라는 장기 목표를 세우고 프랑스어를 1년정도 공부했다. 잘 놀기 위해서 공부했다! 그것은 남들에게 혹은 나에게 공부라고 말하기는 좀 그런 것이었고 일종의 여행 준비였다. 내게는 아주 현실적인 또 실용적인 목표를 위한 행위였다. 그것이 주는 쾌락은 무엇이었나. 스스로가 선택한 것에 대한 자부심. 힘든 과정을 해내고 있다는 만족감. 훗날 여행지에서 소소한 소통의 도구로 쓰일 것이라는 기대감. 새로운 언어(인문학이든 언어든 어느 순간 '앎'의 쾌감을 선사한다.) 그것도 세간의 관심에서 쇠락해가는 언어와 친근해진다는 소수자의 차별성이 주는 우월감까지... 그 때 나는 내가 공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제도 속에서 얻은 자신감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내가 프랑스어를 무척 잘하게 된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스스로 무언가를 원할 때 그것을 배울 수 있다는 그런 자신감을 얻었다.
좀 더 생각해봐야겠다. 책을 사야할까?
출처:한겨레 책소개글: 지적 평등이 두려워 저들은 독학을 깔본다 _ 고명섭
자크 랑시에르...<감성의 분할>은 헉헉거리면서 냄새를 맡고 또 <호모 사케르>를 사다놓고 아직 제대로 읽지를 못해서 <무지한 스승>을 사서 보고 싶은 마음과 억누르는 마음이 서로 줄을 당기고 있다. 어쨌든 <무지한 스승> 소개글에서 내가 이해한 바는 '스승'과 '제자'라는 제도가 가정하는 지적 불평등이라는 원초적 조건이 그리고 그것을 현실화시키는 제도가 배움을 가로막을 수 있다는 점이다. 유아들의 왕성한 지적 호기심과 탐구에 비하면 학생들은 제도에서 시간을 보낼수록 수동적인 자세를 체화하게 된다. 제도는 끊임없이 요구한다. 나를 억누르고 너를 따라가라고 말이다. 그래서 결국 제도가 요구하는 최소의 자발성조차도 포기해버린 무기력한 학생들이 양산된다.
얼 쇼리스의 <희망의 인문학>과도 일견 통하는 지점이 있어보인다. 너희들에게 필요한 것은 밥이지 인문학은 어림도 없어라는 세간의 생각을 뒤엎는 시도, '우리는 언제 최대로 영민함을 발휘하여 배우는가'라는 질문은 배움의 과정이 인내와 고통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의 획득과 그로인한 쾌감에 있는 것일 수 있다는 점에서 연결되지 않을까.
오래전 나는 체제의 답답함과 일상의 반복이 주는 구속감이 미치도록 싫었고 그래서 틈만나면 어디론가 탈출하고자 했다. 그것은 영화이기도, 술이기도, 연애이기도, 여행이기도 했다. 그 시절, 유럽여행이라는 장기 목표를 세우고 프랑스어를 1년정도 공부했다. 잘 놀기 위해서 공부했다! 그것은 남들에게 혹은 나에게 공부라고 말하기는 좀 그런 것이었고 일종의 여행 준비였다. 내게는 아주 현실적인 또 실용적인 목표를 위한 행위였다. 그것이 주는 쾌락은 무엇이었나. 스스로가 선택한 것에 대한 자부심. 힘든 과정을 해내고 있다는 만족감. 훗날 여행지에서 소소한 소통의 도구로 쓰일 것이라는 기대감. 새로운 언어(인문학이든 언어든 어느 순간 '앎'의 쾌감을 선사한다.) 그것도 세간의 관심에서 쇠락해가는 언어와 친근해진다는 소수자의 차별성이 주는 우월감까지... 그 때 나는 내가 공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제도 속에서 얻은 자신감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내가 프랑스어를 무척 잘하게 된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스스로 무언가를 원할 때 그것을 배울 수 있다는 그런 자신감을 얻었다.
좀 더 생각해봐야겠다. 책을 사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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